[장인우 연재 02] 그리움 두고 그리움 찾아 떠나는 노래
[연재] 장인우의 문학 산책 | 역설의 문학, 최명희 『혼불』 002 "세월이 흘러 50년이 지났어도 녹원삼(錄圓衫), 휘황한 그 빛은 선연하여 조금도 바래지 않았습니다. 초록 몸바탕에 너울같이 넓은 색동 소매, 진홍, 군청, 노랑, 연지에 연두, 다홍을 물리고, 부리에는 눈같이 흰 한삼이 드리워진 색동 소매, 흰색 안감을 받친 푸른 비단 다섯 폭 치마, 그 위에 꼭두서니빛 다홍치마를 입고, 속적삼 위에 분홍색 속저고리와 노랑 삼회장저고리, 초록색 곁마기 끼운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주홍 산호, 노란 밀화, 물빛 비취, 붉은 유리, 푸른 구슬들을 한 줄로 꿰어 세우고, 앞뒤 쪽에 진주 광택이 나는 등황색 석웅황(石雄黃)이 갸름하게 가로 놓인 족두리를 썼습니다."
[연재] 장인우의 문학 산책 | 역설의 문학, 최명희 『혼불』 002
사람과사회™ 통권4·5호
사람과사회™는 한국 고전을 중심으로 글을 쓰는 장인우 선생의 글을 연재합니다. 장 선생은 ‘장인우의 고전 읽기’ 등 고전문학을 뼈대로 삼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연재는 ‘장인우의 문학 산책’으로 진행합니다.
-사람과사회™
그리움 두고 그리움 찾아 떠나는 노래
소설 『혼불』(도서출판 매안, 2014, 제2판 제19쇄) 제1부 제2권과 제2부 제3권에는 인월댁과 청암부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 여인의 운명은 비슷한 듯 다르다. 인월댁은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여인이다. 매안이씨 가문에 들어오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청암부인이 종가(宗家) 종부(宗婦)로서 종친을 설득해 가문의 일원으로 들인 여인이다. 청암부인은 기구한 운명 속에 내박쳐진 인월댁에게 작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인월댁은 마당에 나서는 것조차 삼가며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며 살았다. 인월댁은 임종이 가까워진 청암부인과 속에 있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나눴고 초혼, 고복의식도 맡았다. 청암부인은 혼례를 치렀지만 사흘 후 열여섯 살이던 남편 이준의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청암부인이 칠십삼 세가 되어서야 남편을 만나러 가게 된다. 청암부인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온몸으로 살아온 까닭이었을까. 부인은 혼례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을 떠난다. 이 글은 두 여인이 겪은 삶의 이야기를 청암부인의 목소리를 빗대어 담은 것이다. 칠십 평생을 살아온 청암부인의 회한을 대신 전하는 심정으로 쓴 글이다. 이선희가 부른 ‘인연’은 청암부인의 속내, 이준의에 대한 고결하고 순결한 사랑을 그대로 담아놓은 것 같아 글 첫머리에 넣었다. 제목을 ‘그리움 두고 그리움 찾아 떠나는 노래’로 지은 까닭이기도 하다.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 걸 다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라는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 녹슬지 않게 늘 닦아 비출께요
취한 듯 만남은 짦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 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 테죠
먼 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 생애 못한 사랑 이 생애 못한 인연
먼 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이선희, 「인연」
나, 이제 갑니다.
열여섯 적 당신을 만나고, 고희를 넘긴 일흔셋, 이제야 모든 것 내려놓고 당신 곁으로 갑니다. 꿈만 같습니다.
인월, 그 사람은 나에게 ‘소멸’을 말했습니다. 혼례를 치르던 날 밤, 사모관대도 벗지 않고, 자색 단령 자락 ‘휙’ 소리를 내며 방문을 나섰던 기서가, 매안(埋安)조차 들르지 않고 경성으로 떠나버린 뒤, ‘기다림’, 속절없는 기다림은 당신의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월, 그 사람은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북쪽으로 난 방 안에서 말 한 자리 나눌 사람조차 없이 베틀에 앉아, 각시 복숭아 꽃잎 개울에 날려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무섭게 적막한 밤을 보내며 말했지요.
“잘라 내자. 원도 한도 없이 잘라내자. 마음이 지닌 모든 집착을 버리고, 버려서 끝내는 다시 태어날 인연을 남기지 않겠다.”
불쌍헌 사람……. 만류(挽留), 인월의 간곡한 만류를, 마음 깊은 곳에 남겨두고, 열여섯 손을 흔들고 떠나던 당신을 향해, 이제, 내가 갑니다.
이준의, 사무치게 그리운 이름,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이름, 가슴 밑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수도 없이 부르던 이름, 그 이름, ‘청암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 부르지만, 불러도 불러도 뼈마디에 새겨질 뿐 손에 만져지지 않는 그 이름을 찾아 내가 갑니다.
열아홉에 소복 입고, 홀로 텅 빈 집에 신행(新行)을 오던 날, 많이 울었습니다. 곱고 앳된 신랑, 매안으로 돌아갈 때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어 많이 울었습니다. 친정에서 떠나기 하루 전 날, 당신은 참으로 딱하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마치 내가 누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매달려 울었습니다.
‘하룻밤만 더 재워 달라고, 하룻밤만 더 있다 가게 해 달라’고 어린아이 응석 부리듯 하는 당신을 어르고 달래어 기어이 보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고 쓰라렸지만, 반가(班家)의 도리라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위로 층층이 어른이 계시고 남의 이목도 번다한데……. 뒷모습이 그렇게도 측은하여 산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 그날, 그날 하루만 피했어도, 그토록 허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인데…….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단 한 가지 정표마저 논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자부(子婦)의 폐백조차 살뜰히 받지 못한 채 떠나신 시부(媤父), 그 허망한 자리를 메우고 종가의 종부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함(函) 속에 든 형형색색 비단을 돈으로, 논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한평생 그 무엇으로도 당신의 정표에 대한 그리움, 허망함은 메울 수 없어 “내 이제 죽어 육탈(肉脫)이 되거든 합장(合葬)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마중 나오십니까?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적막한 길, 혼자서 가는 먼 길, 먼저 간 길을 나중이라고 못 가겠습니까마는, 마중이라도 나와 준다면 너무 늦게 왔다 타박이 적을 것 같아, 이렇게 청해 봅니다.
아직 곱습니다.
세월이 흘러 50년이 지났어도 녹원삼(錄圓衫), 휘황한 그 빛은 선연하여 조금도 바래지 않았습니다. 초록 몸바탕에 너울같이 넓은 색동 소매, 진홍, 군청, 노랑, 연지에 연두, 다홍을 물리고, 부리에는 눈같이 흰 한삼이 드리워진 색동 소매, 흰색 안감을 받친 푸른 비단 다섯 폭 치마, 그 위에 꼭두서니빛 다홍치마를 입고, 속적삼 위에 분홍색 속저고리와 노랑 삼회장저고리, 초록색 곁마기 끼운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주홍 산호, 노란 밀화, 물빛 비취, 붉은 유리, 푸른 구슬들을 한 줄로 꿰어 세우고, 앞뒤 쪽에 진주 광택이 나는 등황색 석웅황(石雄黃)이 갸름하게 가로 놓인 족두리를 썼습니다.
분 향기 머금고 혼서지(婚書紙) 배접해서 만든 신발도 신었으니, 거부할 수 없었던 인연, 거부할 수 없었던 운명을 안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 당신 곁으로 갑니다. 다시는 나를 놓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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