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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는 기억하는 것”

“아빠, 엄마 사랑해요. 고마웠어요. 두 분 모두 기억할게요.”

추모는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들과 딸들은 아마도 그들의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를 오롯하게 알지 못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 3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나대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집을 나와 떠돌았고, 20여 년 전 아버지 역시 하시던 일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셨다. 아버지는 거의 매년 미국과 한국을 오가셨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너무 단편적이다. 사진=Pixabay

아버지에 대한 기억

김성원 생활기술과놀이멋짓연구소 소장

사람과사회™ 2018 겨울 & 2019 봄 통권8·9호

추모는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들과 딸들은 아마도 그들의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를 오롯하게 알지 못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 3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나대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집을 나와 떠돌았고, 20여 년 전 아버지 역시 하시던 일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셨다. 아버지는 거의 매년 미국과 한국을 오가셨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너무 단편적이다.

4일장 마지막 날, 다음 날 장지로 가기 위해 함께 밤을 보내게 된 친인척 열여덟 명이 모였다. 나는 망자에 대해 각자 가지고 있는 기억을 나누자고 제안했다. 미처 자식들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더 알고 싶었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큰 고모, 작은 고모,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큰 아버님 댁 사촌 형님 두 분 내외, 사촌 누나, 작은 아버지 댁 사촌, 그리고 우리 사남매와 며느리, 사위가 돌아가며 아버지에 대한 짤막한 추억들을 이야기했다.

두부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던 홀어머니를 위해 보름달밤 30리 길 땔감을 하러 다녀야 했고, 열아홉, 열일곱 작은 가방만 가지고 무작정 상경해서 남의 집 계단 밑에 기거하며 안 해본 일이 없던 어린 형을 기억하는 작은 아버지. 대한모방에 다니며 차비를 아끼려 아직 완공되지 않은 한강철교 골조를 건너다 떨어졌다 살아난 아버지를 기억하는 작은 고모.

작은 오토바이에 산처럼 짐을 싣고 가다 넘어졌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일어나 가시던 위태롭던 모습과 동대문 시장에 물건을 납품하며 힘겹게 골목 시장을 뛰어다니던 모습을 기억하는 나와 둘째 동생, 늘 사랑을 주시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막내 여동생, 기계를 직접 만들고 수리하고 무엇이든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셨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남동생. 방황하던 자식을 잡아준 며느리에게 고맙다며 낙지 떡볶이를 직접 요리해주시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나의 아내. 돈 한 푼 없이 결혼하며 처가에 들어가 살림을 시작한 둘째를 호되게 꾸짖는 모습을 기억하는 제부.

가난한 집에서 무슨 공부냐는 큰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매를 맞아가면서도 고집스럽게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우고, 끝끝내 농고까지 다니셨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큰 사촌형, 대한모방을 나와 가내수공업을 시작하곤 집 세 채와 강남과 목동에 적지 않은 땅을 살 정도로 부를 모았지만 그 품에 살림 어려웠던 큰 고모네, 작은 고모네, 외삼촌, 이모 식구까지 챙기며 일을 주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도와야했던 아버지, 하지만 자립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의존만 하는 인척들에게 매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던 아버지.

자식들에게도 돈을 꿔주면 반드시 갚게 하고,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결국 택시운전까지 해야 할 때이긴 하지만 사남매 모두 대학입학금을 내주곤 그 다음부터 자식들이 각자 알아서 등록금을 벌며 대학에 다니게 했던 아버지. 미국으로 떠날 때는 이십대 사회초년생이었던 자식들이 함께 살 작은 집 한 채만을 남기고 모든 재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버리셨던 아버지.

한편으론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고 한편으론 조금 서운함을 느끼게 했던 아버지. 가난한 동네에서 사업을 펼쳐 일찍 마을협동조합을 만들고 함께 일본에 제품을 수출하고, 직원이기도 한 동네 이웃들과 매년 광복절 날 함께 버스를 대절해 여행을 떠났던 아버지. 교회가 전부라 여기며 교회 일에는 아끼는 게 없었던 아버지. 목사로 키우고자 했지만 기대와 달리 자꾸 엇나간 장남을 끝까지 못마땅해 한 아버지.

그럼에도 나와 동생들은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녹녹치 않은 고단한 삶을 성실하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하게 살며 자식을 키우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성실함을 모두 물려받았다. 자식들에게까지 약간은 매정하셨지만 결국 어디에 내어놔도 각자의 삶을 살아갈 강한 자립심을 키워주셨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자식들 모두 당당하게 의존적이지 않게 살아간다. 모두 손가락에 가루가 묻으면 병적으로 털어내는 기질도, 조금은 성급한 성질도, 약한 호흡기도, 나쁘지 않은 머리도…….

기억이 흩어지기 전에 우선 서둘러 거칠게 기록해둔다. 추모는 기록이라 믿는다. 이제 시간을 들여 아버지 사진들을 디지털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정리할 계획이다. 그때 다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할 것이다. 마침 군대에서 만난 아버지와 평생지기로 지내셨던 목사님이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걸 이제 알았다. 그분도 찾아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며 더하련다.

30년 전 먼저 가신 어머니 곁에 아버지를 합장해드렸다. 자식 모두 장례를 치르느라 눌러두었던 눈물을 한꺼번에 비석 위에 떨구었다. 아버지는 지금 말하면 공대생 기질이다. 단박하고 고집스러웠고 강하셨다면 어머니는 자식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자애로웠고 지혜로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50여 명의 이웃 아주머니들이 상복을 입고 장지까지 쫓아오셨다.

처음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간호학교를 다녔지만 끝내 그 길로 가지 못했다. 가난한 아버지와 결혼하고 고생만 하시다 가셨다. 너무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쌍둥이인 나와 둘째를 작은 어머니에게 젖동냥해 키우셨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어머니에 대해 묻어두었던 기억들도 조금씩 되살아난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분들도 시간을 두고 만나보아야겠다.

“아빠, 엄마 사랑해요. 고마웠어요. 두 분 모두 기억할게요.”

이제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김성원
생활기술과놀이멋짓연구소 소장. 적정기술, 생활기술 연구자이며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관리자다. 국내 최초로 흙부대 집을 짓고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이웃과 함께 짓는 흙부대 집』(들녘, 2009)과 ‘로켓 스토브’와 ‘고효율 개량 화덕’, ‘로켓 매스히터’, ‘구들 개량법’을 세계의 화목난방장치와 비교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하고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소나무, 2011), 『화목난로의 시대』(소나무, 2014) 등을 출간했다. 고효율 화목난로 공모전이자 적정기술 전람회인 「나는 난로다」 공동 기획자이고 최근까지 이 행사를 주도했다. 유럽의 고효율 화목난로, 러시아 페치카와 유럽 축열식 벽난로의 이론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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