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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의 人才, 대장금·장영실·허준·동청래

장금, 임금 지시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된 의녀…장영실, 자신의 한계 뛰어넘어 입신양명한 인물…허준, 서자 출신으로 정1품에 오른 전설의 명의…동청래, 군 고위 지휘관에 오른 귀화인 2세

국가기록원이 ‘타임머신’에 올린 글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임금이 비정규직을 직접 챙겨 국가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기록원은 ‘대장금 비정규직 9년, 임금이 직접 정규직 지시’라는 글에서 대장금·장영실·허준·동청래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비정규직, 서자, 노비, 외국인이었지만 임금이 정규직 또는 고위직 자리를 맡았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 중 하나다. 요즘처럼 조선시대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두고 왕과 신하가 의견 대립을 보였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노동자의 삶을 살펴본다.

국가기록원이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바탕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대장금, 장영실, 허준, 그리고 동청래는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 임금이 관심을 갖고 능력을 키워준 사람들이다. 특히 대장금은 임금이 직접 정규직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대장금·장영실·허준·동청래, 이들은 왕이 주목한 인재들이었다. 사진=국가기록원 홈페이지

동청례은 귀화인 2세가 장군에 오른 사례다. 연산군 재위 때 위장(衛將, 종2품)을 지냈다. 동청래는 세종 때 귀화한 여진족 등소로가무의 아들이다. 성종 4년인 1473년 무과에 급제했다. 급제 20여년 만인 1493년에는 종6품부터 종9품까지 임명할 수 있는 습독관(習讀官, 전문교관)에 제수됐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같은 직급의 다른 관직을 받았다. 연산군 즉위 이후 변방의 야인들을 잘 다스린 공로로 1497년 통정대부(정3품)로 당상관 반열에 올랐으며, 1503년 군 고위 지휘관인 위장(衛將, 종2품)이 되었다. 사진=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조선왕조실록』과 인재 등용

王이 주목한 人才, 대장금·장영실·허준·동청래

국가기록원이 ‘타임머신’에 올린 글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도 임금이 비정규직을 직접 챙겨 국가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기록원은 ‘대장금 비정규직 9년, 임금이 직접 정규직 지시’라는 글에서 대장금·장영실·허준·동청래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비정규직, 서자, 노비, 외국인이었지만 임금이 정규직 또는 고위직 자리를 맡았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 중 하나다. 요즘처럼 조선시대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두고 왕과 신하가 의견 대립을 보였다.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노동자의 삶을 살펴본다.
-편집자註

국가기록원이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바탕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대장금, 장영실, 허준, 그리고 동청래는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 임금이 관심을 갖고 능력을 키워준 사람들이다. 특히 대장금은 임금이 직접 정규직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대장금·장영실·허준·동청래, 이들은 왕이 주목한 인재들이었다.

대장금, 임금 지시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된 의녀

중종 19년인 1524년 12월 15일에 있었던 일이다. 임금이 성종 조 이후 의술(醫術)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며, 발전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기록원은 장금이 정규직이 되고 상당히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의녀의 요식(料食, 급료)에는 전체아(全遞兒, 상근직으로 규정된 급료 전액을 받는 정규직)와 반체아(半遞兒, 일이 있을 때만 입궐하며 급료의 반액을 받는 비정규직)가 있는데, 요즘 전체아에 빈자리가 발생해도 이를 보고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체아 전환을 아뢰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 같은데, 장금(長今)은 무리 중에서 의술이 나으니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할 수 있도록 전체아를 주어라.”

기록원은 장금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중종 10년인 1515년 3월 21일, 내의원 상벌을 논의하는 내용이다. 실록으로만 보면, 비정규직(반체아) 9년 만에 정규직(전체아)이 됐다. 장금은 정규직 전환 이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이 호칭이다. 이름 앞에 대(大)를 붙여 대장금(大長今)으로, 의녀 대신 내의녀(內醫女)로 불렸는데, 이로 보아 지위가 상당히 격상된 것으로 보인다.

중종은 1544년 11월 15일 57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장금은 중종의 38년 2개월 재위 기간 중 30여년 이상을 함께 했다. 말년의 기록에서 보듯이 어의들은 물론 내의원 제조까지 임금의 증세를 장금에게 설명을 들어야 할 만큼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밖에도 실록에는 장금이 조선 최고의 의녀였음을 보여주는 여러 기록이 있다.

장영실, 자신의 한계 뛰어넘어 입신양명한 인물

동래부 관노에서 대호군(종3품)에 오른 장영실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입신양명한 인물이다. 장영실은 세종이 찾은 인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태종이다. 세종 15년인 1433년 9월 16일 기사는 세종이 장영실의 호군(護軍, 정4품 무관직) 승진 이유를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태종이 보호하셨고, 나 또한 아낀다. 영실은 솜씨뿐 아니라 인간됨과 성격이 좋고, 똑똑하기가 보통이 아니다”고 설명하는 내용이 근거다.

장영실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 7년 1426년 4월 18일이다. 당시 직급은 사직(司直, 정5품 무관직이나 무보직으로 녹봉 책정을 위한 직급)이었다. 1433년 9월 16일 기록에는 별좌(종5품 녹봉이 없는 무관직) 장영실을 호군(정4품 무관직)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장영실은 10여 년의 논쟁 끝에 정규 조정직제인 호군에 올랐다. 장영실은 이후 자격루,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 최첨단 관측기구를 설치한 흠경각(欽敬閣) 완공에 기여한 공로로 1438년 1월 7일 대호군(大護軍, 종3품)에 올랐다.

기록원은 장영실이 별좌가 된 것은 이보다 1년 앞선 1432년으로 처음 거론된 이후 10년 만이고, 사직과 같은 5품이며, 녹봉마저 없는 자리 때문에 오랫동안 논쟁을 벌인 이유에 대해 “별좌는 녹봉이 없는 대신 1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며 “임금은 장영실이 별좌가 된지 1년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4품에 임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허준, 서자 출신으로 정1품에 오른 전설의 명의

서자 태생으로 정1품에 오른 ‘전설의 명의’ 허준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75년 2월 16일로 어의 안광익과 함께 상을 진맥했다는 내용이다. 허준은 30세이던 1569년 6월 이조판서 홍담(1509~1576)의 천거로 파격적인 조건인 종4품(대부분 종8품으로 시작)으로 특채했다.

서자 출신의 허준이 이조판서의 천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의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청년 시절부터 교류했던 『미암일기』 저자이자 이조참판을 지낸 유희춘(1523~1577)의 힘이 컸다. 1591년 3월 3일 실록을 보면, 허준의 정3품 통정대부 승진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당시 중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급은 종3품이었다. 하지만 허준은 종1품 숭록대부를 거쳐 1605년 1월 3일 정1품에 제수됐고 생전에는 오르지 못하고 사후에 추증됐다.

동청래, 군 고위 지휘관에 오른 귀화인 2세

동청례은 귀화인 2세가 장군에 오른 사례다. 연산군 재위 때 위장(衛將, 종2품)을 지냈다. 동청래는 세종 때 귀화한 여진족 등소로가무의 아들이다. 성종 4년인 1473년 무과에 급제했다. 급제 20여년 만인 1493년에는 종6품부터 종9품까지 임명할 수 있는 습독관(習讀官, 전문교관)에 제수됐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같은 직급의 다른 관직을 받았다. 연산군 즉위 이후 변방의 야인들을 잘 다스린 공로로 1497년 통정대부(정3품)로 당상관 반열에 올랐으며, 1503년 군 고위 지휘관인 위장(衛將, 종2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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