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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民은 또 다른 離散家族”

“탈북민은 이산가족에 들지 못하는 ‘또 다른’ 이산가족…탈북민은 왜 생이별해야 하나”…“딸 찾으러 중국 갔다가 한국 정착…탈북민, 통일 기대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크다”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으로 정착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떤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지난 1998년 중국으로 건너가 2003년 다시 남한으로 정착한 마순희 선생을 만났다. 그는 통일부 산하인 남북하나재단에서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전문상담사로 근무했다. 마 선생은 인터뷰에서 ‘북녘 사람은 왜 생이별해야 하느냐’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도 진짜 이산가족인데, 북녘 사람은 왜 생이별해야 하나”며 반문했다. 무엇보다 “탈북민은 이산가족에도 들지도 못하는 또 다른 이산가족”이라며 “통일을 기대하는 마음은 그 어느 누구보다 크다”고 강조했다. 사진=마순희

그날 밤으로 짐을 다 정리하고 초상화(김일성·김정일) 액자를 두 개를 다 닦아놓고, 초상 휘장(김일성·김정일 배지)을 제일 좋은 옷에 달아 놨다. 가다가 잘못돼서 잡히더라도 이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던 사람인데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구나 생각하게 하게끔 편지를 써놓고 나섰다. ‘사회주의는 내가 없어도 지켜지겠지만, 내 딸은 내가 안 찾으면 누가 찾겠는가, 내 자식 찾으러 가야 되겠다’라고 써 놨다. 탈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때 당시 전혀 못했다.

탈북민이 보는 남북 관계 그리고 한반도 미래

[인터뷰] 마순희 前 남북하나재단 전문상담사

“脫北民은 또 다른 離散家族”

“탈북민은 이산가족에 들지 못하는 ‘또 다른’ 이산가족…탈북민은 왜 생이별해야 하나”

“딸 찾으러 중국 갔다가 한국 정착…탈북민, 통일 기대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크다”

사람과사회 2018년 여름·가을 통권6·7호

남북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같은 일들이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깜짝 만남이 시작이었다. 6·25전쟁 총성은 휴전 상태로 멎었지만 전 세계 유일하게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나뉘고, 틈만 나면 서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은 ‘4.27 판문점 선언’ 이후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시화할 것처럼 보이다가 미국이 중국이 훼방을 놓는다는 모양새가 되면서 흔들렸다. 왜 우리가 평화를 말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말하는 와중에 미국과 중국의 간섭 아닌 간섭을 받아야 하는지를 역사적 사실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이야기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남북이 엄중한 요즈음,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으로 정착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떤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지난 1998년 중국으로 건너가 2003년 다시 남한으로 정착한 마순희 선생을 만났다. 그는 통일부 산하인 남북하나재단에서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전문상담사로 근무했다. 마 선생은 인터뷰에서 ‘북녘 사람은 왜 생이별해야 하느냐’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도 진짜 이산가족인데, 북녘 사람은 왜 생이별해야 하나”며 반문했다. 무엇보다 “탈북민은 이산가족에도 들지도 못하는 또 다른 이산가족”이라며 “통일을 기대하는 마음은 그 어느 누구보다 크다”고 강조했다.

2018년 6월 5일 양천구에 있는 교회 1층 커피숍에서 마 선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에는 남북정상회담과 북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들어 있다.

대담 신원재 데일리즈 국장 siaon@naver.com
정리 신상인 데일리즈 기자 dailiesnews@naver.com

“죽어도 안 변하는 게 어디 있나?”

▲탈북민은 남북 관계 개선 시점에서 기대할 게 많을 것 같다.

나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나이가 68세다. 언니, 오빠가 모두 북한에 살아 계신다. 하지만 얼굴도 못보고 돌아가시는 거 아닌가 싶어 조급해진다. 북한도 엄청 통일을 외친다. 남한에 오니까 남한도 엄청 통일을 외치더라. 서로 외치면서 남과 북이 통일하는 것을 어떤 관계들 때문에, 미국과 중국이 반대한다는 것으로 들었다.

‘자기들이 뭔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갈라놓고, 서로 못 보게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같은 경우는 도망치다시피 (북한을) 나왔지만 그래도 식구들과 행복하게 만나서 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위정자가 너무 밉다. 정치는 위정자가 하고 백성은 그냥 자기 일이나 하면서 살면 되지 않나. 봉건사회나 노예사회나 위정자를 제외하면 우리 같은 백성들은 다 ‘민초’였다. 각자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일을 하고, 그냥 편하게 일만 하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 형제들도 못 보고 가는 거 아닌가 싶다.

보수든 진보든 누구든지 통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대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을 지지해서라도 꼭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탈북민이라면 거의 같은 생각일 것이다. 어느 날 이렇게 (4.27 남북정상회담이) 되고 나니까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나는 탈북민이고 정치는 잘 모른다. 그런데 어떤 이슈가 있으면 서로 상반되는 양 쪽 진영에서 문자가 엄청 많이 온다. 같은 이슈를 가지고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렇게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늘 놀랍고 또 불편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요즘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뉴스를 먼저 틀게 된다. 밤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두 대통령이 손잡고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기대된다. 물론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 밀고 당기기도 있을 것이고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길 것 같다. 하지만 내 나이 세대는 거의 비슷하다. 젊은 애들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속지 말라고, 핵을 포기하느냐고, 죽어도 안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살아보니 죽어도 안 변하는 게 어디 있나?

“한국은 남남갈등 심하지만 북한은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나라 대 나라가 되면 어느 정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겠나?

우리는 지금 북한에 돈을 보내면 30~40%를 떼인다. 절반도 못 갈 것이다. 그래도 지금 돈을 보내주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고 10~20% 국가가 받더라도, 공적 어떤 라인이 있다거나 하는, 결국 안전하게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하튼 (정상회담과 긍정적인 남북 관계를 보면) 너무 기대가 되고 환영할 일이다.

▲우려와 걱정은 없나?

오히려 남한 내부가 문제일 수 있다. 한국은 남남갈등이 워낙 심하지만, 북한은 아니다. 유일 지도 체제로 정리된다. 중대장이 ‘노루를 보고 사슴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노루도 사슴이 된다. 특히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어느 쪽으로든지 서로를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싶지는 않다. 북한에서 금방 온 사람에게 ‘북한에서는 최고 통치자가 바뀌고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우리는 그냥 내 식구 먹여 살리면 되지, 뭔 상관이냐’고 말하더라.

▲민족이 통일하는 관점에서 북미 관계와 주변국을 어떻게 생각하나?

만약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이 주변 강국이라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인데, 우리끼리 잘 하면 되지, 왜 주변 강대국 눈치를 보면서 할 일을 못 하나. (눈치 보는 게) 이해가 안 된다.

한국에 온 후 시민교육에서 배울 때는 ‘통일은 쉽게 안 된다, 남북한만 합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드는 생각으로는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전 세계가 바라고,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가가 통일을 한다고 하면 대 놓고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라 본다. 뒤로는 어떤 조건을 내세우더라도 세계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면서 대국으로서 통일을 반대할 명분도 없고, 한 마디로 면이 안 서지 않나.

“딸은 중국에 따라갔다가 자본주의 처음 봤다”

▲고향, 직업, 탈북 계기 등 자신을 소개해 달라.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이다. 1998년 6월 탈북했다. 큰딸이 배급도 못 받고, 노임도 못 받고 하니까 일주일 휴직 기간에 돈 벌어오겠다며 중국에 갔다. 중국에서 돈 벌어 오면 북한에서 작은 가게라도 차려 식구가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큰 딸아이는 중국에 따라갔다가 자본주의를 처음 봤다.

신작로, 철길을 따라가면서 두만강이 흐르는데, 강 건너 편에 중국 마을이 있다, 시내에서 물건을 사서 농촌 마을에 맡겨놓고, 나중에 낟알로 바꿔 걸어서 오가다 보면 밤까지 걸어야 된다. 그때 중국 쪽은 네온등이 번쩍번쩍하고 북한 쪽은 등잔불 몇 개만 있을 뿐 천지가 깜깜하다. 극과 극이다. 북한이란 사회는 감시하는 눈이 많아서 그 때에는 두만강 건너 중국을 길게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녔다. 중국 쪽 화려한 불빛이나 그쪽 사람이 나와서 노는 모습을 보면 그쪽을 동경한다고 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사적여관에서 취사원으로 일했다. 김 씨 일가가 현지지도하면 사적지가 되고 하루라도 묵어가면 사적여관이라는 게 된다. 사적여관에서 취사원으로 일하기 전에는 무산광산정양소라는 곳에서 옥수수나 잡곡으로 국수 만드는 일을 12년 동안 했다. 그런데 그 곳은 잡곡이 많아 배급이 잘 안 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잡곡을 가루로 내서(만들어서) 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그러다 탈북 3~4개월 전에 사적여관에 다녔다.

북한에서는 노동자가 휴가 기간 동안 이용하는 ‘휴양소’와 일하면서 숙식을 제공받는 ‘정양소’가 있다. 정양소는 노동자 중에서 몸이 허약하거나 노력 혁신자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인데, 일반 배급소처럼 7:3 혼합이 아닌 백미 100%와 일부 육류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 ‘영양제 식당’(기업소에서 영양이 필요하다고 선택을 받은 노동자가 먹을 수 있는 식당, 배급보다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과 비슷하다.

중국에서 일명 브로커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남한 사회에서 일했던 조선족이나 탈북한 사람이 북한 사람과 탈북민에게 연락하고, 중간에서 한국의 은행과 통장을 이용해 송금을 도와주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일을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브로커를 통할 때 기본 수수료 20~30%를 떼고, 다시 북한에 보내면 북한에서 또 20~30%를 떼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을 신흥 부자로 인식하는 면도 있다고 한다. 사진=마순희

“나는 돌아갈 마음이 없다”

▲중국에 갔다가 한국에 오게 됐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맏딸은 광산에 다녔고, 둘째딸은 무산광산선전대에 다녔고, 막내는 졸업해서 광산선전대에 다니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고향에선 광산이 제일 큰 기업이다. 국수를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처럼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중국에 가서 돈 번다고 간 맏딸을 찾으러 가는 길이 고향과 이별하는 길이 됐다.

맏딸 입장에서는 북한 직장에 나가도 하루 종일 옥수수와 국수, 그것도 요~만큼(아주 조금) 먹고 하루 종일, 그 중 8시간은 곡괭이질과 삽질을 하면서 힘들게 일을 했다. 그런데 중국에 처음 가서 보았더니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편하게 살고 있는, 그런 것을 보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맏딸이 ‘나는 돌아갈 맘이 없다, 자식 하나 죽은 셈치고 몇 년 만 기다려주면 좋은 사람 만나 시집을 가든 중국에서 돈을 벌든 해서 집을 도와주겠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를 받아 들고 어떻게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찾으러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거기서는 인신매매라고 하고, 여기서는 브로커라고 부르는, 탈북하는 사람들 안내하는 삼촌이 있었다. 그때는 삼촌이 그런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애를 데려간 후 애는 버리고 편지만 가져왔다. 그래서 ‘우리 딸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두만강 넘어 길진이라는 마을에 있다’며 강만 건너가면 있다고 하기에, 그래서 그럼 ‘우릴 거기에 데려다 줄 수 있냐’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딸만 만나면 되겠다 싶었다. 삼촌이 큰딸을 데려다주고 중국 돈으로 1,000원 정도 받은 것 같았다. 당시 1,000원은 북한에서 1년을 일해도 만져볼 수도 없는 큰돈이었다. 정말 큰돈이다. 그 사람(삼촌)도 아내가 중국 쪽으로 가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와이프 찾으러 중국에 왔다 갔다 하다가 그 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니까 처자 하나만 넘겨다주면, 자기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니까, 그런 길로 들어섰던 것 같다. 큰딸 하나 데려가면 내가 딸 셋 데리고 살았으니까 무조건 딸 찾으려 건너갈 것이라는 타산(계산)을 했을 것이다. 데려다 준다기에 그래서 그날 밤 당장 짐을 정리하고 무조건 애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고, 다른 애(딸)들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딸을 찾으면 같이 돌아오고 딸을 못 찾으면 거기서 딸을 찾을 때까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갈라져 살 수는 없다 생각했다.

그날 밤으로 짐을 다 정리하고 초상화(김일성·김정일) 액자를 두 개를 다 닦아놓고, 초상 휘장(김일성·김정일 배지)을 제일 좋은 옷에 달아 놨다. 가다가 잘못돼서 잡히더라도 이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던 사람인데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끔 편지를 써놓고 나섰다. ‘사회주의는 내가 없어도 지켜지겠지만, 내 딸은 내가 안 찾으면 누가 찾겠는가, 내 자식 찾으러 가야 되겠다’라고 써 놨다. 탈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때 당시 전혀 못했다.

“내 자식 찾으러 가야 되겠다”

▲1998년 6월 25일, 20년이 흘렀다. 이때는 여름철이 가까운 때인데, 나서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탈출했나?

1998년 6월 25일, 이 날은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고 모두 (읍내로) 내려간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가 봐 두 딸이 먼저 가고 갈라져서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에는 나도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딸을 찾는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자고 깨어나면 누구네, 누가 죽었다, 누구네 집이 모두 도망쳤다는 뒤숭숭한 그런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먹는 부분에서 일했기에 (먹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좀 낫다 하지만 항상 불안했다. 하루가 불안하고, 하루 먹으면 다음날 먹을 걸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중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6월 25일에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우리 식구가 와서) 딸이 있으면 데려갈 것을 아니까 이미 빼돌리고 없었다. 3일은 작은 딸들과 같이 농가 지붕 위에서 지냈다. 농가 양철지붕 위에 있는 지붕 밑에 삼각형으로 만든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사람을 피신시킨 후 팔아넘기려고 만든 장소다. 추운 지방이니까 지붕 밑에 겨를 겹으로 깔고 비닐과 담요를 깔고 천장에 공기구멍처럼 구멍을 만들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사다리만 치우고 입구만 닫으면 밖에서는 모르는 구조다.

3일 후 우리를 빼돌려야 되는데 변방대 순찰차(공안)가 30분에 한 대씩 다니니 조심스러웠다. 공안이 길가에 있는 사람들 다 잡아서 단속을 하며 순찰을 하니 숨을 수밖에 없다. 거기 있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거쳐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위에 머리핀이며 리본 같은 것들이 널려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다행히 남한 소설책이 쌓여 있아 불을 켜고 계속 소설책만 봤다.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다 연길 시내로 가야 하는데 화룡(허룽, 和龙)을 거쳐 연길로 빠지는 외통길에 초소가 있어서 그 초소를 에둘러 산을 몇 개나 넘으면서 가야 했다. 브로커 집에는 연길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는 누이동생 남편이 택시를 운전했다. 북한 여자를 데려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사람을 데리러 택시를 갖고 온다. 현대판 노예처럼 사람을 앉혀놓고 가격을 흥정한다. 중국말은 잘 몰라도, 그런 모양새다 싶었다.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도록 북한과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 달라고 했고 안내를 하는 브로커 친척이 있는 흑룡강성(헤이룽장성, 黑龍江省)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그곳과 연결된 곳으로 데려갔다. 그런 일은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라 아무나 못한다. 우리를 데려갔던 여자 측 남편이 공안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때에도 북한 사람이 잡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하니까 남편 직위를 등대고 그런 일을 해서 큰돈을 버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도 힘 있는 사람이 브로커로 돈을 번다.

▲중국도 힘 있는 사람이 브로커로 돈을 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중국에서 일명 브로커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남한 사회에서 일했던 조선족이나 탈북한 사람이 북한 사람과 탈북민에게 연락하고, 중간에서 한국의 은행과 통장을 이용해 송금을 도와주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일을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브로커를 통할 때 기본 수수료 20~30%를 떼고, 다시 북한에 보내면 북한에서 또 20~30%를 떼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을 신흥 부자로 인식하는 면도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있다. 그러다 보니 누가 어렵다고 그러면 다 같이 모여서라도 도와준다. 집단 속에 개인의 몫이 있다. 이런 생각으로 집단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 집단생활은 나름대로 살기 괜찮았는데, 너무 계급적으로 나눠 차별을 받고, 그런 게 힘든 것이다. 한국처럼 자유가 많지는 않지만, 이웃 간에 정도 많고, 그런 생활은 추억도 많고 좋은 기억도 많다. 사진=마순희

“중국도 힘 있는 사람이 브로커로 돈 번다”

▲중국에서 딸을 만나 얼마나 지냈나?

애들이랑 만나려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 다 만나지더라. 큰딸이 가족을 살리겠다고 (중국으로) 갔는데, 큰딸이 도망쳐서 운 좋게 나를 만났고, 나머지 두 딸이 있는 곳으로 가게 돼 그곳에서 모두 만나 4년 6개월 즈음 살았다. 한국에 올 때는 세 딸하고 같이 왔다.

사실 중국 공안이 계속 잡아가지 않았으면 여기(남한)로 오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지낸 생활을 생각하면 맘이 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마음은 편하게 살았던 것 같다. 땅이 넓어서 농사만 지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맘만 먹으면 고향에 갈수도 있고…. 한국처럼 각박하게 살지는 않는다. 북한에서 계속 탈북민을 넘겨 달라고 하고, 공안 단속이 심하고, 그래서 불안한 마음이 가장 큰 것일 뿐이다.

북한에서도 안정된 직업을 갖고 살았다. 하지만, 살기는 바빴다(힘들었다). 그 땅에서 잘 살았으면, 그 땅에서 살면서 딸이 오기를 기다리지 뭐 하러 오겠나.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이나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게 있나?

물론 한국에 비할 바 없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도 사람이 사는 데니까, 사람 사는 정 같은 것도 당연하다. 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살기에 큰 불편을 모르고 살았었다. 그런 게 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 말할 때 모든 게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북한은 집단주의 체제로 산다. 사회주의 제도가 다 무너져서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살기가 괜찮았다. 직장을 계속 옮겨 다니는 것보다 한 곳에 계속 다니면 가족보다 더 가까워진다, 공동체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까 한 식구나 다름이 없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있다. 그러다 보니 누가 어렵다고 그러면 다 같이 모여서라도 도와준다. 집단 속에 개인의 몫이 있다. 이런 생각으로 집단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 집단생활은 나름대로 살기 괜찮았는데, 너무 계급적으로 나눠 차별을 받고, 그런 게 힘든 것이다. 한국처럼 자유가 많지는 않지만, 이웃 간에 정도 많고, 그런 생활은 추억도 많고 좋은 기억도 많다.

“북한은 서로 경계하고 감시하는 체제”

▲공동체 생활이 남한과 어떤 차이가 있나?

9남한은) 자기밖에 모른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그게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더라. 북한에서는 어떤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찬양을 받을 일이면 다 같이 축하해준다. 그렇지만, 만일 안 좋은 일이 생겼다거나 탈북민이 생기면 본의 아니게 여론이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온다.

개인주의 사회하고 집단주의 사회라는 게 그런 점에서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여론이 여러 사람을 죽인다. 나머지 인근 가족도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친하다고 생각하고 대여섯 명이 모였을 때 속마음을 얘기하면, 그 중 누군지는 모르는데, 그 말이 조직에 들어간다. 그러면 죄송하다, 잘못했다는 비판서를 써야 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 ‘누가 말했을까’라며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감시를 하는 게 그 체제의 성격이다.

‘여론’은 일종의 ‘소문’인데, 북한 사회 내에서는 모두 조직 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조직 생활이란 당 조직을 제외한 사로청(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직맹(조선직업총동맹), 여맹(여성동맹) 농근맹 (농업근로자동맹) 등 근로단체 조직이 있어서 누구나 다 조직에 망라돼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그런 조직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남의 일에 크게 관심하지도 않으니까 마음 편한 것 같다. 충성이라는 게 상하 관계는 있지만 수평 관계에서는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통제 방법이다. 그 사람들은 수직으로는 충성하게 하고 모든 일을 보고하게 하지만, 수평적으로, 다시 말하면 노동자들끼리 단결하고 우리끼리 연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고 경계하도록 생활총화제도를 만든 것 같다. 단합해서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반대할 때는 당연히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남한에서 가장 힘든 점은?

‘외로움’이다. 딸 셋이 같이 있으니까 외롭다고 하면, 그래서 혼자 나온(탈북한) 사람에게는 좀 그런 표현이겠지만, 탈북 전날까지 직장 생활을 했으니까 직장 생활에서 떨어져 혼자 고립된 것 같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 서울 명동 한복판에 있어도 내가 소통하고 얘기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유일한 돌파구가 가정밖에 없는데 가정도 보통 일이 아니더라.

“산은 남북한이 똑같기에 산에 가서 외로움 푼다”

▲외로움을 어떻게 풀어내나?

산에 간다. 외로움이 생기는 것은 집단에서 분리돼 소속감이 없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럴 때마다 산속에 들어가면 안정감이 생기고 푸근함이 있는 것 같아 너무 편안하다. 번화한 한국 사회를 벗어나 산속에 가면, 북한 산속이나 남한 산속이나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살던 환경과 비슷하니까, 또 한 강토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착하는 속도를 보면 애들은 나하고 다르다. 애들은 빨리 배운다. 더구나 엄마이기 때문에 낯선 세계에 들어 온 딸들이 불안하니까 자연히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된다. 지금이 몇 시인데 이렇게 늦게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 치마가 짧은 게 아니냐, 화장이 진하다는 등 자꾸 잔소리를 한다. 그러다 보니 애들하고 점차 멀어지더라. 소통이 잘 안 되고……. 이제는 시간이 흘러 서로가 이해하다 보니 많이 나아졌다. 남한 사람처럼 외식을 자주 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안 되고, 소통에도 도움이 별로 안 된다. 그래서 집에서 음식 만들면서, 차려 먹으면서 소통한다.

▲남한과 달리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딸들과 갈등이 없었나?

그쪽에서는 내 위주로 돌아갔다. 엄마 말이면 무조건 듣고 그랬는데…. 중국에서는 각자 따로 살면서 전화로 가끔 통화했기에 잘 몰랐다. 엄마로서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어렵게 사는 모습을 생각하면, 애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자책도 많이 했다.

북한에서는 노동자 주택에서 살았지만, 중국에서는 세 딸이 살고 있는 집을 돌아다니면서 살아서 내 집도 없었다. 농촌 마을에서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이고 혼자 사는 할머니조차 부러웠다. 한국에서는 임대주택이지만 내 집이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처음 하나원에서 나온 날, 여러 가지로 많이 피곤해도 잠을 못 잤다. 쓸고 닦고, 또 쓸고 닦고, 내 집이라고 하니 집이 너무 좋았었다.

마순희 선생은 2017년 10월 4일, 딸과 남한에 있는 친인척 등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임진각을 찾아 고향과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딸 한정선 씨는 “임진각에는 사촌, 이모 등이 함께 참석했는데, 가족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20년이 흐른 지금도 제사를 단 한 번도 지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진=마순희

“아직도 북한 사람이 더 편하고 좋다”

▲2003년 한국으로 왔으니 약 15년이 지났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남북하나재단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은 했지만 지금도 하는 일은 많아요.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동포사랑』 편집위원이기도 하고, 가끔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대략 4년 동안 한국에 잘 정착한 탈북민 사례를 발굴하고 취재하는 ‘착한(着韓) 사례’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을 만났다.

오늘은 딸이 햇감자를 사왔는데 주변 사람과 감자전을 해먹으며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이전 회사 동료나 교회에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모여서 놀기도 한다, 남한 사람과 잘 지내고 있지만, 아직 만나서 음식을 같이 해먹으며 함께 지낼 정도까지는 아니다. 아직도 북한 사람과 만나는 게 더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여하는 단체가 몇 개 되는데, 거기서도 조직 구성원으로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다만 아직도 편하고 익숙하지는 않다.

▲교회를 다닌다고 했는데, 남한에서 다니게 됐나?

북한은 교회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만 다니더라. 농촌에서는 농사지으며 잘 사는 사람이 많은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집안이 어렵거나, 집안에 장애인이 있거나, 사정이 어려운 사람만 다니더라. 일요일이면 초가집 같은 데 모여서 기도하고 그랬는데,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다. ‘하루라도 풀을 뽑지 않으면 안 되는데, 노래하고 손뼉을 칠 시간에 풀 한 포기 더 뽑는 게 더 낫다’며, ‘저렇게 하니까 초가집 맨날 빚지고 살지’, 이런 말을 한다.

중국에서 살 때 동네 사람 중에서 교회에 다니는 집은 초가집에서 사는, 모두 못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것이 궁금하긴 했는데, (북경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들어가야 하는데, 급하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도 모르면서 ‘하느님이 불쌍한 어린 양들을 대한민국까지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눈물로 기도했다. 그 절박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어쩌다 보니 그날 낮에 몸싸움을 하면서 무사히 영사관에 들어갔다(2003년 마순희 씨와 세 딸은 4년 6개월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주중 한국영사관으로 뛰어들며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남북하나재단 전문상담사로 근무했는데, 어떤 일을 했나?

지금은 재단에서 하고 있는 성공 사례를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야기, 한 마디로 탈북민의 성공적인 정착 이야기를 널리 소개하는 일이다. 사회통합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하나재단은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北韓離脫住民支援財團)’의 별칭이다. 남북하나재단은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통일부 산하의 공공기관이다. 재단은 한국에 온 탈북민의 초기 정착에서부터 생활안정지원, 취업지원사업, 교육지원, 인재양성사업, 그리고 국민인식개선사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을 하고 있다.

2011년 4월 재단에 공채로 입사했는데, 61세 때니까, 다른 사람들 퇴직할 나이다. 다행히 2007년부터 탈북민을 도와주는 한 민간단체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상담을 하다 보니 그 경력이 채용에 도움을 준 것 같다.

성공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평가하는 사람이 볼 때 취업이나 창업을 했다가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폐업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성공률을 정하기는 애매하다. 처음에 발굴할 때는 먼저 취재했던 사람이 추천하거나 상담사, 민간단체에 부탁해 소개해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1차 발굴 취재를 한다. 그리고 심사를 통해 ‘착한 사례’로 선정하고 그 중에서 해마다 40여 명의 사례를 간추려 착한사례집 『착한공감』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성공적 정착은 ‘걸림돌 안 되기’가 기준”

▲탈북민 3만 명 시대다. 성공한 정착 비중을 어느 정도로 봐야 하나?

성공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성공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회사 생활을 몇 년 이상 계속했다거나, 창업을 한 사람도 몇 년 이상 계속 사업을 하고 있다던가, 청년들 같은 경우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든가, 정상적으로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한 사람 등 다양한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 한국 사회에 짐이 안 될 정도로 자립하고, 또 사회통합이 돼서 소통이 잘 되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남들이 봤을 때 ‘아,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네’, ‘저 사람 성공했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주로 인터뷰했다.

성공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평가하는 사람이 볼 때 취업이나 창업을 했다가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폐업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성공률을 정하기는 애매하다. 처음에 발굴할 때는 먼저 취재했던 사람이 추천하거나 상담사, 민간단체에 부탁해 소개해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1차 발굴 취재를 한다. 그리고 심사를 통해 ‘착한 사례’로 선정하고 그 중에서 해마다 40여 명의 사례를 간추려 착한사례집 『착한공감』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있다.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에 대해 느낀 점은?

김일성부터 김정일 시대를 겪었다. 큰 차이를 못 느꼈다. 경제적으로는 김일성 때가 편안했다. ‘고난의 시기’에는 나라가 어려워졌다. 이 시기를 김정일이 맡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국주의자의 경제 봉쇄로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 고난을 헤쳐 나가야 된다고만 했다. 힘들었던 때다. 하지만 내 식구가 없어지니까, 일단 정치를 떠나서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려워도 참고 살다가 (김정일 때) 어쩔 수 없이 울며 떠나야 했다. 김정은 때는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기존 세대(김일성~김정일)와는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할 것 같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방법을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통일 되면 고향에 어르신 복지 시설 짓고 싶다”

▲ 중국에 있을 때 남한 또는 북한 소식은 잘 들을 수 있었나?

남한이든 북한이든 잘 듣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소식도 중국에서 뉴스로 보고 알았다. 많이 선전을 했다고 하는데,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나마 알게 되는 소식도, 중국에서는 숨어 사는 게 바빠서 그런지, 나중에야 알게 된 게 상당히 많았다.

▲통일이 되거나 남북한이 교류를 할 수 있게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통일되면 딸들과 함께 남아 있는 식구들과 주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고 싶다. 나이가 60이 돼서 대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나눠주고 싶어서였다.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 상담, 법률 공부도 했다. 상담사 일을 하면서 배워야 할 것 같아 열심히 배웠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서울남부지방법원 시민사법위원으로 지금까지 활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민사법위원 자격 덕분에 몇 년 전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개최한 법원의날(9월 13일)에는 유명 인사들만 한다는 야구 시구를 한 적도 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 공부할 때도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도 어르신이 제일 불쌍하다. 애들은 나라의 왕이라고 나라에서라도 돌봐주기 때문에 어른은 못 먹더라도 애들은 먹인다. 젊은이는 직장에 나가서 일하기 때문에 나가면 직장 현장 식당에서 한 끼라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어르신은 오갈 데가 없어 제일 불쌍하다. 제일 많이 고생한 어르신을 위해, 한국에서처럼 내 고향 무산에서 어르신을 위한 복지 시설을 세우고 싶다. 이는 또 평생 고생하신 우리 오빠, 언니들을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다.

한국 돈 100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다. 몇 달은 살 수 있다고 한다. 탈북민이 엄청 많이 보내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북한의 지하경제’라고 말을 할 정도라고 알고 있다. 옛날에는 김일성·김정일 ‘백두산 줄기’가 제일이었지만 지금은 남한에서 보내는 돈, 탈북민이 보내는 돈이 큰 도움을 주면서 탈북민 가족이 있는 사람을 ‘한라산 줄기’라 부르며 ‘제일’이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보위부 사람도 현행으로 잡히지 않으면 웬만한 것은 눈감아 준다는 말도 있다. 사진=마순희

“탈북민이 보내는 돈은 ‘지하경제’ 수준”

▲북한은 노동에 나이 제한이 있나?

있다. ‘연로보장’이 있어서 남자는 60세, 여자는 55세가 되면 일을 안 해도 된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땔감도 해야 하고 ‘소토지’라도 해서(가꿔서) 식구를 먹여야 하니 산을 개간해서 감자, 콩, 옥수수를 경작해 배급이 안 돼 부족한 생활을 버텨야 한다. 오히려 직장 생활할 때보다 더 힘들게 노력해야 살 수 있다.

언니, 오빠가 살아계실 때 있는 돈 다 보내고 싶다. 어렵게 모은 돈이지만 100만 원이라도 보내면, 이중으로 수수료가 빠지지만, 당국이 모르게 하는 것이니 뭐라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는 큰돈이니까 보내야 한다.

한국 돈 100만 원이면 엄청 큰돈이다. 몇 달은 살 수 있다고 한다. 탈북민이 엄청 많이 보내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북한의 지하경제’라고 말을 할 정도라고 알고 있다. 옛날에는 김일성·김정일 ‘백두산 줄기’가 제일이었지만 지금은 남한에서 보내는 돈, 탈북민이 보내는 돈이 큰 도움을 주면서 탈북민 가족이 있는 사람을 ‘한라산 줄기’라 부르며 ‘제일’이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보위부 사람도 현행으로 잡히지 않으면 웬만한 것은 눈감아 준다는 말도 있다.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

빨리 통일이 돼야 한다. 아무리 행복해도 우리의 행복은 반쪽짜리다. 그곳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아프다. 더울 때는 에어컨을 켜고 시원하게 지내다가도 ‘이렇게 더운 날, 밖에서 김매고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마음이 아프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걱정이다. 겨울이면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땔감도 없이 그 추운 데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걱정만 앞선다.

작년(2017)에 오빠네 집은 비가 많이 오면서 집이 떠내려가서 다시 지었다고 들었다. 어제도 지인이랑 밥을 먹고 있는데, 지인 고모가 별세했다는 전화가 왔어요. 내 잘못이 아니면서도 괜히 식구들에게 죄송한 생각이 든다.


마순희 1998년 6월 중국을 거쳐 2002년 세 딸과 함께 주중 한국대사관으로 뛰어들어 2003년 1월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마 씨의 딸 중 둘째는 탈북 가수와 안보 강사로 잘 알려진 한옥정 씨다. 큰 딸은 현재 미디어 관련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막내딸은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마 씨 역시 초기 정착 과정을 거쳐 2007년 8월 ‘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에서 운영하는 국립중앙의료원 북한이탈주민상담실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탈북민이 남한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담당했다. 탈북민 전문상담사로 일을 하며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세종사이버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등 자격증을 취득했다. 2011년 4월 남북하나재단에 공채로 입사해 종합상담센터에서 탈북민 전문상담사로 근무했다. 탈북민 정착을 위해 정착 과정에서 겪는 일상적 상담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 상담까지 도맡았다. 매월 하나센터에서 진행한 ‘선배 특강’에서 남한 정착 첫 걸음을 떼는 탈북민에게 체험을 바탕으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는 강사로도 활동했다. 2011년부터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찾아가는 종합상담소’(2018년 1월 ‘마순희의 성공시대’로 변경)에 고정 패널로 참여해 탈북민 정착 과정과 살아가는 모습을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널리 알리는 일도 하고 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서울남부지방법원 시민사법위원으로 초빙돼 북한이탈주민들의 법률적인 고충을 해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2015년 남북어울림한마당에서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동포사랑』에도 참여해 탈북민 정착 사례를 소개하는 일에도 동참하고 있다.

※ 이 글은 종합 시사 전문 매체 데일리즈사람과사회™가 함께 게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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