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예찬함
"향에서는 그 사람의 격(格)이 느껴진다. 사람의 결, 나무의 결. 결은 향(香)이자, 향(響)이다. 좋은 냄새는 좋은 울림이 있다"
눈을 감고 나무를 어루만져 본 적 있는가.
사랑하는 이를 안듯 눈 감고 나무를 찬찬히 어루만지다 보면, 향긋한 향이 가슴 깊이 스며들어온다. 소나무라면 거친 수피 그 골에 손가락을 넣어 보자. 대나무라면 매끄러운 피부 마디마디 숨 죽여 커온 흔적을 더듬어 보자. 간혹 자작나무에서 예기치 못한 생채기가 길게 만져지기도 한다. 잠시 숨을 고르며 거기 머물러 보자. 그 결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해마다 두 번은 꼭 찾는 강원도.
숲을 접할 수 있기에 이곳을 다녀오면 ‘강원도의 힘’이란 것이 실감된다. 중학교 시절부터 ‘내 딸 하자’하신 분이 계셔서 언젠가부터 그 분을 모시고 몇 가족이 모여 휴가를 간다. 아이가 많은 나는 혹시나 남에게 누가 될까 싶어 빠지려고도 했지만, 내 아이를 아기 때부터 보아 온 그 분들은 커가는 아이들이 기쁨이라며 한사코 여행 때마다 불러주신다. 그 여행이 20년을 넘어 간다.
겨울 스키를 즐기는 분들은 스키를 타고, 등산을 즐기는 분들은 등산을 즐긴다.
나는 설악 권금성을 케이블카 없이 오를 만큼 산을 좋아했지만, 대학 때 눈 덮인 설악산에서 무릎을 다쳤다. 그래서 일행들이 산을 즐기는 동안 꼼짝없이 산 아래에서 짐을 지키며 그들을 기다리곤 하게 됐다. 하지만 그곳은 나무가 서울의 아스팔트 건물만큼이나 흔한 곳.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자작나무 숲을 거닐며 생각에 빠지는 것이 어느덧 나의 큰 낙이 되었다.
지난겨울에도 어른들이 이제 스키를 탈 만큼 큰 아이들에게 스키를 가르쳐 주며 휴가를 즐겼다. 물론, 나는 산 밑에 있었다. 서로 흩어져있는 일행들의 연락책도 되어주고, 배고파 내려 온 사람들에게 먹을 것도 챙겨 주고… 그리고 그 짬짬이 숲길을 거닐 기회를 엿보는 거다. 혼자 남아 있어도 그 시간이 심심하지 않은 건, 커피와 나무들 덕인 것 같다. 꽝꽝 언 호수 주변을 커피 한 잔 들고 천천히 걷는다. 산과 호수, 그리고 하늘 사이에, 묵묵히 서 있는 나무.
나무가 말을 걸어올 때는 무엇보다 침묵해야 한다.
둥치가 큰 나무는 연륜만큼이나 아름드리 묵직한 말을 건넨다. 작고 여린 나무는 보드라운 잎새로 살갑게 속삭인다. 그 정경은 마치, 깊은 격이 느껴지는 어른이 차 한 잔을 건네며, ‘자, 그래서 뭐가 너를 힘들게 하는 건데’, 그리고 상냥하고 발랄한 소년이 ‘걱정 말아요, 세상은 온통 재미있는 것들뿐 이잖아요?’ 하는 것 같다.
사람도 때론 나무 같아서, 큰 가지를 뻗어 풍성한 그늘을 드리운 이가 있고,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힘 있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는 이도 있다. 거친 삶을 사느라 여기저기 패인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린 묘목처럼 여린 사람이 있다. 사람의 결, 나무의 결. 결은 향(香)이자, 향(響)이다. 좋은 냄새는 좋은 울림이 있다. 냄새의 울림이 매혹적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향에서는 그 사람의 격(格)이 느껴진다.
그 격은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는다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격 없이 겉보기 좋은 사람들에게 세간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껌에는 관심이 없고 껌종이에만 열을 내는 것 같다. 울림 없이 욕망하는 것, 인간의 비루함의 발로이기 쉽다. 격은 형식이라기보다는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드는,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 비천하지 않게 타자를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자존심, 소통을 위해 갖추어야 할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들이 저마다 뿜는 향기를 들이키며 숲의 사랑을 느낀다. 나무 하나 하나는 조금은 촌스럽고 가난할지 몰라도 숲은 범접할 수 없는 위용으로 다가선다. 격과 결이 만난 이들이 향으로 만나 향으로 다가서는 세상을 꿈꾼다.
숲의 힘, 숲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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